절제된 생활·생명 일깨워주는 사순절

사순절 마지막 주간이다. 새 봄과 함께 부활의 계절이 시작됐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며, 절제된 생활과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 새로운 삶을 맛보아야 한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의 계절, 이어지는 부활의 계절이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묻혀버렸다.

죽음 없이 부활은 없다. 부활은 죽임당한 자의 부활이다. 때문에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전쟁과 기아로 힘겹게 살아가는 자, 고난당하는 자들의 고난과 아픔을 나의 고난과 아픔으로 받아드리자고 외치는 것이다. 헌데 국민 모두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길들여진 나머지 이들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한국교회는 한마디로 국회의원 총선거에 취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망각하고, 있다. 모두가 하나님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나라를 세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 이후 나라의 경제가 어렵다고 모두 한 목소리를 낸다. 자영업자들은 못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22대 총선에 취해 고난당하는 자들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의 아픔과 고통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고난을 당하는 세계민족, 살기위해 삶의 현장에 나가다가 죽음으로 돌아오는 노동자, 기아에 허덕이는 남반부 가난한나라의 국민들을 그대로 놓아두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할 수 없다. 그리스도 모두는 이들의 삶이 보다 윤택해질 수 있도록 기도하며,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봉사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며,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다. 또 이것은 그리스도의 길이다. 우리가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금식하며, 기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 대한민국 국민들은 제22대 총선에 들떠 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총선에 묻혀, 세상권력에 쫓아다니다가 자신들이 가야할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제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며,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사회에 뿌리 깊게 내린 이념갈등과 세대갈등, 지역갈등, 보혁 갈등을 청산하고, 미래로 나갈 수 있다.

성경은 갈등의 중심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서로 화합하고, 연합하여 선을 이루라고 했다.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나라는 행동하지 않고서는 열리지 않는다. 죽음 없이 부활은 없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에서 성장의 원동력을 다시 찾아야 한다. 인간 모두가 묵상하며, 새로운 삶을 열 때 비로소 새로운 세상과 미래가 열린다. 오늘 세계는 전쟁으로 인해 하나님의 참사랑과 평화가 위협을 받고 있다.

부활의 계절,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자
잃어버린 교회의 정체성과 교회 본질 회복 계기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 시작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인류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고난을 당하며, 하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 미국의 전국무장관은 다음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날 것이다고 예언했다. 이런 상황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극명하다.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등은 한반도를 또 다시 긴장으로 몰아넣고 있다. 6.25전쟁을 겪은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노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22대 총선에 갇힌 대한민국은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선거를 둘러싸고 곳곳에서 국민들 간에 세대 간의 갈등, 이념갈등. 지역갈등이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중심에 교회가 있다는데 안타깝다. 하나님의 참사랑과 예수그리스도의 평화(샬롬)를 몰각한 결과이다. 자신과 다르면 무조건 빨갱이, 좌파로 매도하는 오늘날의 세태로는 새로운 세상,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도 참여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지도자를 비롯한 대제사장, 기득권자들의 악행은 극에 달했다. 누구도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지 않았다. 정의가 실종됐다. 그러면서 규례에 따라 금식한다면서, 곤궁한 백성들을 외면했다. 이들 위에 군림하려고 했다. 모두가 하나님나라가 아닌 세상나라를 세우려고 한간 힘을 쓴다. 이 때 예언자 이사야가 나타나 규례만을 내세우는 정치지도자, 대제사장, 기득권자들을 향해 경고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줘라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중략)/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쇠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이것이 어째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이하 생략)”(이사야 581-9)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이념과 갈등, 힘에 의한 평화의 흉악한 결박을 풀어 주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한다. 국민들을 옥죄고 있는 규례의 결박과 멍에의 줄을 풀어 주어야 한다.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해 주어야 한다.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유리방황하는 빈민을 집에 들여야 한다. 헐벗은 자를 보면 입혀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스스로 숨지 아니하고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금식하는 이유이며, 규례와 제도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언자 이사야의 외침에 응답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금식을 하면서 왜 하는지를 모른다. 모두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금식은 아닌지. 남이 하니까 덩달아 하는 금식은 아닌지. 한마디로 주리고, 결박당한 백성을 위해서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들에게 자유함을 주는 이도 없다. 금식을 한다며, 규례와 제도만을 고집한다,

오히려 곤궁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하늘의 도움을 간구하는 세계민족, 가난과 질병으로 아사직전에 있는 남반부의 백성들을 외면하며, 이들을 부를 축적하는데 악용하고 있다.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보아야 한다. 부활의 계절,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시작됐다. 뼈를 깎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할 때, 하나님의 나라, 미래가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징계를 면 할 수 없다.

분명 가다가 멈추면 미래가 보인다.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 가난하고 헐벗은 자, 결박당한 자들은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교회를 보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개개인의 죄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죄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세상은 모순 덩어리이다. 자신의 죄를 덥기 위해 곤궁한 백성과 희망을 잃어버린 백성에게 자신의 죄를 뒤집어씌우기에 급급하다. 이들은 하나님나라가 아닌 세상나라를 갈망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 화해자의 삶 실천 중요

이념을 내세워, 빈부의 격차를 내세워, 가짜뉴스를 생산해 국민적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지도자이며, 이를 퍼 나르는 이들이 바로 이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교인들이다. 이들은 남북한 민족, 동서의 분열을 조장한다. 분열된 국민의 화합을 위해, 분열된 남북한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봉사하자고 외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샬롬 대신 힘에 의한 평화, 로마팍스를 외친다.

이런 상태로는 분열된 나라에서 상처투성인 국민을 치유 할 수 없다. 둘로 갈라진 남과 북의 화해와 평화도 담보할 수 없다. 22대 국회의원 후보자는 물론이고, 국민 모두는 국민화합, 평화적인 민족통일, 자유통일 등을 입버릇처럼 외친다. 이를 정치인들은 정치적 이슈로 만들어 국민적 지지를 얻어 냈다. 오늘 한국교회는 정치인 모두에게 국민통합을 위해서 봉사 할 수 있도록 촉구해야 하는 이유이다.

교회가 앞장서서 국민적 통합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한국교회는 국민통합과 평화통일에 대해서 말을 하면서도, 이를 위해서 행동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모두가 허공을 치는 기도에 매달려 있다. 그럼에도 뜻 있는 일부 단체가 하나님의 이름, 국민의 이름으로 제22대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국민화합, 국민통합을 위해 봉사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는 자유라는 이름 아래 국민적 갈등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러면서 매 기도시간마다 한반도의 평화와 국민통합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런 기도는 허공을 치는 가식적인 기도이다. 영미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한마디로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 왔고 보이고 있다. 이런 한국교회가 다행스럽게도 국민화합 사회적, 정치적 역할론과 정치세력화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당을 지지하는 국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며, 야당을 지지하는 국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대통령도 여야 모두의 대통령이다. 매 선거 때마다 대한민국은 둘로 갈라져 심각한 이념갈등, 지역갈등, 세대갈등을 일으키며, 축제적인 선거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 중심에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가 있다는데 참담하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할 수 없다. 새로운 삶을 맛 볼 수도 없고, 미래로 나갈 수 없다.

22대 총선은 국민을 둘로 갈라치기 하는 최악의 선거라는 목소리가 높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는 서로의 입장은 다르지만, 같이 일해야 하는 파트너이다.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며, 함께 살아야 할 공동체의 일원이다. 2024년 부활절을 맞는 한국교회는 예언자의 전통에 따라 화해자,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잘못된 정치인, 세상나라를 만들려고 하는 자들을 향해 외쳐야 한다.

백석대학교 주도홍 교수는 한 심포지엄에서 선거 패거리 싸움에 합세한 목사와 교회도 없지 않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평화의 사도직을 감당해야 한다. 당사자들이 서로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 때, 한국 사회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고난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실체이면서, 인간에게는 따라야 할 이상이다. 인간이 그것을 따라갈 수 있을지언정, 성취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길을 포기할 수도 없다.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화해자중재자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화해자로서, 중재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할 때 비로소 세상나라가 아닌 하나님나라가 실현된다.

로마팍스로 국민화합 이룰 수 없다

둘로 갈라진 국민의 화해와 남북한 민족의 화해는 국회와 정부가 말하기 이전에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서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며,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또한 그리스도인 모두가 가야 할 길이다. 문제는 화해와 평화의 중심에 있어야 할 교회가 분열과 갈등의 중심에 있다는데 안타깝다.

오늘 한국교회는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잊고, 규례와 제도, 이념을 내세워 하나님의 참사랑과 예수님의 평화(샬롬)를 오도하는 일을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 보이려고만 하는 기도는 한마디로 위선이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 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지 못한다.

이들은 고린도교회처럼 서로 분열하고, 비방하며, 분쟁할 수밖에 없다. 교회의 건전성을 상실하고, 복음(기쁜소식=하나님의 참사랑)의 가치를 상실하는 결과만을 낳는다. 한국교회는 2024년 사순절과 고난주간, 부활의 계절,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에도, 서로 다투며, 분열하고 있다. 그것은 부활절연합예배를 끼리끼리 들이겠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한국교회가 화해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 되었다는 소식은 그 어디에서도 들여오지 않는다. 그러면서 힘에 의한 평화, 로마평화를 외치기에 바쁘다. 하나님을 숭배하며,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는 나라를 숭배하며, 세상나라를 건설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국민과 정치인들을 향해 국민통합을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교회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치에 깊숙이 간여해 왔고, 간여하고 있다. 사실 기독교는 정치와 함께 발전해 왔다. 심지어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피 묻은 손에 기도를 해 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고난당하는 이웃을 외면 할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경제체제가 뿌리를 내리기 이전까지만 해도, 정치와 경제, 그리고 인간의 모든 삶이, 천상을 위한 삶인 종교에 예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경제체제가 뿌리를 내린 이후부터는 종교는 경제에 예속되는 결과를 불러 왔다. 신의 자리는 돈으로 대치됐다. 여기에다 정치는 종교, 문화,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오는 10일 제22대 총선은 사순절과 고난주간, 부활절에 잇대어 실시한다. 한마디로 축제인 부활절을 정치가 삼켜버렸다. 오늘 한국의 종교는 정치와 경제에 예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 한국교회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미겔>199212월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호에서 오늘날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질서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 <슈미겔>의 기자는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시장이 등장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신의 현현은 다우존스 주가지수이고, 그의 성체는 미국의 달러이며, 그의 미사는 환율조정이고, 그의 나라는 그렘린의 지도자들까지도 찬양하는 자본주의적 보편 문명이라고 했다.

하나님 대신 돈이 최고인 시대

독일 시사주간지 <슈미겔>은 오늘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맛을 잃어버린 한국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데 문제가 없다. 오늘 한국교회는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교회 마다 교인들의 삶과 신앙생활을 돈으로 평가하는 한국교회가 됐다. 믿음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이다. 헌금을 많이 드리는 교인이 교회 내에서 목소리를 크게 낸다. 사람으로부터 돈을 많이 받은 교단 및 단체의 지도자는, 이들을 영웅, 아니 교주이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이 신이 되면, 이웃종파,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인간이 신이 되어 이웃나라를 침략한 푸틴, 히틀러, 김일성, 일본의 천황 등의 죄상을 우리는 똑똑하게 보았다. 오늘날 일부에서 이를 찬양하며, 국민을 분열로 이끌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며, 이들로부터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인 전도에서 벗어났다.

예수님의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지 못하고 있다. 대신 서로 공격하고, 다투며, 분열하기에 바쁘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가족의 전도를 위해서 근심하거나, 걱정하지도 않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러시아 탱크를 막아서는 모습은, 한마디로 가족과 국가를 걱정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마음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전쟁을 벌이면서, 신의 이름으로 피조물을 죽이고,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해당하는 우크라이나 국민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기아로 굶어 죽어가는 남반부 나라의 국민들을 위해서 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사순절, 고난주간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고, 한반도의 평화, 남북한민족의 화해를 외쳐야 한다.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근심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어리석은 지도자들의 힘겨루기로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2024년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절에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하고 강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를 갈망해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2024년 사순절과 종려주일을 보내고, 고난주간, 부활절을 맞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근심을 하며, 지난 과거의 상처를 아물게 해야 한다. 자기를 속이는 근심에서 벗어나 생명의 소중함과 새로운 삶을 맞보는 생명의 계절, 부활의 계절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교회성장의 동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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